
1997년 당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입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일명 지그재그 3부작으로 불리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로도 유명합니다. <체리 향기>는 이 작품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립니다.
1. 한 줄 줄거리(스포x)
테헤란 외곽을 배회하던 한 남자('바디')가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건네며 벌어지는 이야기.
2. 감상 후기(스포o)
1. 바디가 차에 태우는 사람의 기준?
영화의 극 초반부, 바디는 인부를 찾아다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본인을 고용해달라는 인부들이 많은 도심에서는 사람을 태우지 않습니다. 황량한 외곽으로 가서,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서 사람을 구합니다. 영화의 이미지 상으로 보면 도심은 사람들의 활기가 넘치는 곳이고, 황량한 외곽은 죽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묻힐 장소 역시 황량한 곳이죠. 이처럼, 바디는 삶의 의지가 가득한 도시인들을 외면하고 '죽음'과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입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인가?' 등 자신만의 체크리스트가 있는 것 같았죠. 죽음에 다가가기 위해 동반자를 물색하는 과정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가 굉장히 궁금해지는 구성이었습니다.(차마 삶의 의지가 넘치는 사람들에게는 부탁할 수 없었던 걸까? 많은 사람이 있는 공간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이는 몇몇 사람에게만 자신의 계획을 전달하고 조용히 마치고 싶었던 걸까?)
그 와중에 차에 태우지 못한 극초반 인물들과의 대화에서는 '단절'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소음에 의해 바디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다시 물어봐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죠. 바디는 본인이 왜 우울한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대화의 단절을 통해 바디가 어떤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말하는 사람' 바디
바디는 군인과 신학생을 태웁니다. 상대방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다가 자신의 부탁까지 이야기하죠. 군인과 신학생은 거절합니다. 신학생은 왜 자살을 도울 수 없는지 말하려 하지만 바디에게 제지당합니다.
바디는 계속해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카메라 역시 계속 자신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 바디를 찍어주죠. 군인과 신학생은 자신의 생각은 거의 말하지 못합니다. 바디만 자신의 생각, 의견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들도 차에 타는 순간부터 부탁을 거절하는 순간까지 거의 생략 없이 관객들은 볼 수 있습니다.
3. 구불구불한 길, 반복적인 장면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은 유난히 '반복되는 장면'을 생략하지 않고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키아로스타미의 반복은 오히려 몰입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얘기한 대화들의 반복뿐만 아니라 '아까도 왔던 구불구불한 길을 느릿느릿 돌아가는 장면들'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황량하고 구불구불한 길이 마치 인생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바디'가 가고자 하는 길이라는 측면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4. 노인을 만나며 시작된 변화
앞서 말했듯, 키아로스타미는 같은 과정을 거의 생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차 타고 황량한 길을 가는 과정까지도 볼 수 있었죠.
그런데, 노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공사장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바디가 차에 타는 순간, 이미 노인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상태고 심지어는 바디의 부탁을 수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복을 보여주다가 일어난 급격한 장면의 전환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저도 영화를 보다가 이 부분에서 놀랐고 '아 뭔가 중요한 부분이구나! 뭔가 터닝포인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노인은 앞선 군인이나 신학생과는 달랐습니다. 대화를 이끄는 '말하는 사람'이 노인이 된 것이죠. 우리는 줄곧 바디의 '말하는 얼굴'만 보다가 바디의 '듣는 얼굴'을 보게 되고, '말하는' 노인의 얼굴도 처음 보게 됩니다.
노인이 바디가 가보지 않은 길로 안내하는 순간부터 말입니다.(가장 좋아하는 장면!!)
노인: 좌회전해주세요.
바디: 이 길은 모르는데요.
노인: 난 알아요.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다워요.
계속 죽음의 길로만 가고 있던 바디에게, 사실은 다른 길(인생의 선택지)도 있다는 말을 해주면서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 연출이 이토록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반복'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인은 '체리 향기' 때문에 자신도 삶을 포기하기 직전에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죽음을 결심하려다가 나무에서 체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다시 삶을 살고 싶어졌다는 것인데요. 이는 관점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묘하게 <원더풀 라이프>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화함으로써 다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처럼 체리 향기는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사와 환자 이야기도 해줍니다.
"손가락으로 내 몸을 만지면 몹시 아파요.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를 만져도 아프고 배를 만져도 손을 만져도 아파요."
의사는 자세히 진찰한 후 이렇게 말했어요. "몸은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어요."
자넨 마음이 병들었소. 다른 덴 문제가 없어요. 생각을 바꿔봐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바디가 생각을 고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바디는 '들음으로써' 변화했습니다.
바디는 노인을 다시 찾아가서 자신이 수면제를 먹은 후에도 혹시 살아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부탁하는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죠.
5. 마지막
이제 바디가 바라보는 일상의 풍경들은 그에게 다르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비록, 그가 구덩이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열린 결말을 보여주지만 관객들은 '그가 결국 구덩이에서 나오지 않을까?'라는 것을 상상하게 되죠.
3. 총평 + 별점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변화. 돌아가는 길 속에서 발견한 '체리 향기'
★ ★ ★ ★ ☆
개인적으로 정말 인상깊게 봤습니다. 느릿느릿한 로드무비를 보는 느낌이었고, 반복하다가 급격하게 전환되는 연출, 그에 따른 주인공의 변화와 같은 것들이 너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주인공이 왜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는지 알려주지 않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고요하게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루함을 잘 견디지 못하신다면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격렬한 감정이나 극적인 사건도 없거든요. 저는 이러한 방식이 좋게 다가왔지만 보시는 분들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